생활&생존&생각

똥강아지! 예술

seungbeomdo 2025. 2. 4. 04:08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Lover's discourse>

사랑에 빠진 주체는 사랑하는 존재에 대한 자기 욕망의 특별함을 제대로 이름하지 못한 채 그저 사랑스럽다라는 어리석은 말에 의지하고 만다. (...) 내가 내 욕망의 특별함을 더 많이 경험할수록 나는 더욱 더 그것에 이름을 줄 수가 없다. 과녁의 정확함은 이름의 동요와 상응한다. 욕망에 특유한 것, 욕망에 고유한 것은 말로 적절하게 담을 수 없다. 이렇게 언어가 실패하고 나면, 오직 하나의 자취만이 남는다. '사랑스럽다'는 말.


할머니는 손주를 똥강아지라고 부른다. 우리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지만 언어로는 사랑을 담아낼 수 없다. 사랑을 말하기 위해 사랑한다고 말할 수 밖에 없음에 아쉬움을 느끼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을 이야기할 때마다 아쉬운 마음에 헛소리를 하게 된다. 사랑에 대해서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그 주위를 빙빙 돌아다닌 흔적이다. 나는 이 지점이 예술의 훌륭한 동기부여라고 생각한다. 도달할 수 없는 좌표 주위를 빙빙 돌다가 마음을 툭툭 건드리는 것. 그 좌표는 어쩌다 한번씩 체험될 뿐이지, 그에 도달하는 경로를 명확하게 기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 소설은, 영화는, 그림은, 음악은, 분석적인 방식을 택할 수 없을까? 왜냐하면 이들은 우리 언어를 초월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분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을 이야기하는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이 "사랑해"라고 말하는 방식을 쓰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중언부언하고, 비유하고, 은유하고, 반어하고, 역설하고, 멀리 돌아가는 방법을 택한다. 우리는 언어를 넘어서는 경험을 하기 위해 부단히 언어를 비틀고 괴롭힌다. '쓸모없음'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는 예술의 고유한 영역은 이렇게 만들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