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이 처한 사회경제적 조건이 그 사람의 의식을 규정한다"라고 맑스가 쓸 때, 그 문장은 정확하다. 하지만 구조주의적 관점과 결합되면서 계급이론은 사회구성원들을 "그가 처한 계급 위치의 담지자일 뿐"인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부르디외의 문제제기는 이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계급구조가 그 개인의 의식과 행위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실천의 자율성을 열어두어야 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매개적 개념이 아비투스이다.
아비투스란 개인의 말투, 취향, 취미, 옷차림, 식습관 등으로 그 개인의 생활양식을 지칭한다. 그러나 그 의미는 단순히 취향을 넘어서 그 개인이 처해있는 계급적 조건을 드러내는 것으로서의 취향이다. 노동자는 노동자 특유의, 자본가는 자본가 특유의 취향을 갖는다. "나는 이걸 좋아해"라는 가치중립적인 의미로서의 취향이 아니라 그로부터 그 사람의 사회경제적 조건이 파악되도록 하는 무엇이다.
"사람들의 개인적인 실천은 간접적인 지식이 아니라 사회세계에 대한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에 기초한다. 사람들이 일상적에서 경험하는 감각과 지식은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의 맥락에서 지속적으로 그들의 행위, 상호작용, 태도 등을 통해서 몸으로 체득된다. 그렇게 체득된 부분은 시간이 지나면서 행위자의 반복적인 실천을 통해 자연스럽게 체화되어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아비투스가 된다." p.215
부르디외는 구조-아비투스-행위의 3단계를 통해서 구조와 행위를 연결시키면서도 행위에 자율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주어진 계급적 위치는 그 사람의 일상적 환경을 형성하고, 그 일상 속에서 사람들은 아비투스를 형성한다. 아비투스는 다시 그 사람의 행위를 창출하는 기반이 된다.
내가 내공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지만, 근데 이런 식으로 아비투스를 구조와 행위 사이에 집어넣었다고 해서, 토대의 결정력을 보존하면서도 행위자의 자율성이 열리는 어떤 이론적 모델이 완성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여전히 토대가 아비투스를 결정하고, 그리고 다시 아비투스가 행위를 결정하는 식으로.
그런데 그 어디에 행위의 자율성이 있을까? 난 사실 변증법의 오래된 명제처럼, 구조는 반구조를 포함한다는 것으로 구조-행위 자율성의 문제를 충분히 해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구조는 반구조를 포함하기 때문에, 구조에 의해 결정된 행위가 반구조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아비투스 개념의 의의는 행위의 자율성을 회복하는 모델의 관점보다는, 현실의 계급을 이해하는 문제에서 더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마르크스가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를 근거로 계급의 구분을 객관적으로 정의한 이후, 그리고 경제적 조건이 그 사람의 의식을 규정한다고 한 이후로 계급적 위치와 계급적 행위는 마치 한쌍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이해되었다.
"계급,신분,권력 등과 같은 요소는 조작적 정의를 통해서 구축되는 이론적 계급이며, 이렇게 이론적으로 구성된 계급 범주를 실제 살아 있는 집단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이 외적으로 표출되는 집단적 생활양식을 관찰하는 것이다. 만일 이론적으로 구성한 계급 범주로부터 직접 계급의식을 장착한 행위자 집단을 도출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불가피하게 실패할 수밖에 없다. 부르디외는 그러한 시도를, 실제 살아있는 행위자 집단으로서의 계급을 이론적으로 구성된 계급으로 물화시키는 지식인 중심주의라고 비판한다. (...) 오히려 현실에서의 행위자 집단은 사회적 평가로 구분되는 생활 양식의 차이로만 나타날 수 있다. 이는 계급이란 소유가 존재로 전화되어 생활양식으로 표출되는 한에서만 관찰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부르디외는 계급실천을 사회경제적 위치에 기초해서 직접 도출하려는 야심을 기존 계급으론이 범하고 있는 가장 큰 오류라고 지적한다." p.204
"부르디외는 전통적 계급이론의 실체주의적, 객관주의적 전통을 거부한다. 사회계급은 단순히 어떤 개인이 생산관계에서 점하고 있는 위치에 따라서 규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한 집단을 구성하는 개인들은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필연적으로 서로 상쟁적 관계에 들어서게 되고, 이 관계는 행위자의 위치 및 지위의 차이를 논리적 체계적으로 드러내며 그것을 구별 가능한 특성들로 변화시킨다. 계급은 존재 자체로서뿐만 아니라 인지된 존재를 통해서 규정된다. 그러므로 어떤 계급을 규정하고자 할 때는 단순히 생산관계에서의 그 위치만 가지고 판단해서는 안 되며, 그 상징 관계의 차원을 함께 고려해야만 한다.(...) 이들의 의식은 어떤 계급 존재에 대한 성찰적 의식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얻은 일상적 인지양식이다. 일상적 실천은 사회구조를 지속적으로 재생산하는 활동일 뿐만 아니라, 주어진 사회적 조건을 끊임없이 변화시켜가는 실천적 활동이다." p.207
"이러한 삶의 존재 조건은 경험 속에서 상이한 아비투스를 생성하며 이를 통해 실천형식들은 차이를 갖게 된다. 이때 취향은 사물을 구별적 기호로 변화시키는 실천의 실행자로서, 객관적으로 분류되는 실천형식들을 상징적으로 구별되는 의미의 차이로 변화시킨다. 이렇게 해서 성향은 특정 계급의 사회적 지위의 표현, 즉 외적으로 드러나는 생활양식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된다." p.214
『부르디외 읽기』, 정선기
'사회학또는그냥마음의문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뜨거운 구황작물 (0) | 2026.01.24 |
|---|---|
| 대충 오그라들지 않는 제목 (0) | 2025.10.08 |
| 어쩔수가없다 - 난 이런 거 좋아하는데 (0) | 2025.09.29 |
| 미시적 가부장성의 노골화 (0) | 2025.06.25 |
| 어설퍼보이는 것 (0) | 2025.06.08 |